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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남이 생기자 절친이 뒤통수를 쳤다│18세를 반납합니다│김혜정 단편소설모음집│청소년문학 │성장소설│10대의 우정/로맨스/썸/가족/오글오글 본문

책 리뷰

썸남이 생기자 절친이 뒤통수를 쳤다│18세를 반납합니다│김혜정 단편소설모음집│청소년문학 │성장소설│10대의 우정/로맨스/썸/가족/오글오글

SEA OTTER'S BOOKSHOP 2020. 1. 7. 12:09

https://youtu.be/3lZOZf_wGaI

책 ‘18세를 반납합니다’는 2019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지원사업에 선정된 책이며 김혜정 작가의 세 번째 성장 소설이기도 합니다. 작가 김혜정은 책에 총 6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는데요,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선 18세 청춘이 겪는 갈등과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혼자 고뇌하거나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며 담담히 18세를 겪어 나갑니다. 물론 나이를 반납해버리고 싶다며 토로하는 친구도 있죠. 지금부터는 단편소설 ‘봄이 지나가다’의 줄거리를 조금 각색해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새 학기가 시작된 3월, 제가 다니는 숙덕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체육시간 후 반에 돌아오니 사물함에 넣어 둔 생리대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죠. 반 아이들은 범인을 찾아야 한다며 서로를 의심했지만, 정작 잃어버린 친구 민정은 공부나 하자며 넘어갔습니다.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니 반 아이들도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모두들 속으로 누가 범인일까 의심하면서 한 달을 보냈습니다.

 

어느새 학교 울타리 주변으로 난 벚꽃나무에서 하얀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다들 운동장에 나와 축구시합, 피구시합에 열중이었죠. 며칠 전 한 친구가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반 단합대회를 제안한 결과였습니다. 제안을 들은 날까지도 반 아이들은 생리대 도난사건 때문에 서로 서먹해 했는데요, 아이들도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의견에 동의했죠. 마침 지필고사도 다 끝난 오늘, 아이들 모두는 한껏 들뜬 상태로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남자들이 축구경기를 하는 사이, 여자들은 스탠드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축구는 무승부 상태로 후반전을 달리고 있었죠. 경기가 끝나기 5분 전, 미드필더를 맡고 있던 홍상윤이 결승골을 넣었습니다. 같은 팀 아이들은 이겼다는 환호에 차 소리를 질렀고, 여자들은 막판 역전 골이 나온 상황에 놀라면서 돌고래 소리를 냈죠. 그 때, 홍상윤이 저에게 손가락 하트를 날리는 세리머니를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두 팔을 머리 위에 올려 하트까지 그렸죠.

 

운동장에 있는 모두가 저를 쳐다봤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닌 사이에 괜히 오해만 사는 것 같아 얼굴을 붉혔습니다. “오, 윤인서 얼굴 빨개졌네.” 경기를 마치고 스탠드로 걸어오던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진 건데 제 속도 모르는 반 친구들은 윤인서, 홍상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쑥덕거렸죠.

 

홍상윤과 제가 화제의 중심이 된 이유는 아무래도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홍상윤은 마의 16세를 잘 넘겼다며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죠. 집안 좋고, 키 180cm에 얼굴도 몸매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몸매가 좋다는 칭찬을 자주 들어온 편입니다. 남자들에게 대쉬도 많이 받았죠. 그치만 저는 남자친구도 남들의 주목도 싫어했습니다.

 

여자들의 피구 경기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피구를 잘했기 때문에 공격을 맡기로 했죠. 정신없이 상대팀 공격수를 제거한 뒤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자, 건너편에서 공이 날라왔습니다. 저는 우리 팀 수비가 던진 공인 줄 알고 손을 뻗었으나 놓쳐버렸고, 공은 제 가슴팍을 강하게 때렸습니다. “윤인서 얼른 나와!” 테두리에 선 수비가 아파하는 저에게 나오라며 소리 쳤습니다. 우리 팀 수비가 아니라 상대팀 공격수가 던진 공이었던 것이죠.

 

저와 같은 팀 공격수였던 여진도 제게 험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중학교 때 피구부 였다는 애가 실력은 왜 그 모양이냐?” 씩씩거리는 여진을 모범생 민정이 진정시켰습니다. 둘의 말투는 상극이었지만 부모님이 친한 덕분인지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경기가 끝난 후, 아이들은 구령대에 불판을 펼쳐놓고 삼겹살을 구워 먹었습니다. 홍상윤은 제 옆에 다가와 쌈을 싸 건네 주었죠. 아이들이 웃기 시작하자 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때, 희연이라는 친구가 저에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희연이는 평소 말이 별로 없는 과묵한 앤 줄 알았는데 여진이 얘기, 홍상윤 얘기, 모의고사 얘기 등등 조잘조잘거렸습니다.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저는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며칠 뒤, 희연이는 집으로 저를 초대했습니다. 아직 집까지 갈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졸라대는 희연이를 따라 그냥 가보기로 했죠. 희연이는 주스와 과자를 내 오더니 저에게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나 도벽이 있어.” 비밀을 지켜주라며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희연을 보고 저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어요. 그러다가 제게 남자친구를 사귄 적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끈질기게 물어보는 바람에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죠.

 

중학교 때 잠깐 사귄 남자친구는 만나기만 하면 제 몸을 만지려고 야단이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라고 재촉하는 탓에 짜증이 났고 저는 헤어지자는 통보를 했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집에서 나온 저는 갑자기 온 몸에 열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날 이후 이틀 동안 장염에 시달리며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죠. 희연이는 제게 반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하듯 수시로 카톡을 보냈는데요, 읽씹이라도 하면 왜 답이 없냐며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학교로 돌아간 날, 저는 희연이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5교시가 될 때까지 계속 엎드려 있었습니다. 잠깐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나자, 희연이는 얼른 팔짱을 끼고 제 얼굴을 보고 웃었죠. 마치 넌 절대 날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눈빛이었습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저는 희연을 따돌리려고 교문을 빠르게 벗어났습니다.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보란 듯이 웃으며 걸어가는 희연과 몇몇 반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자 건너 가려던 저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쳤습니다. 모범생 민정이었습니다. 민정이는 이번주 토요일 점심때 있을 자기 생일파티에 제가 왔으면 좋겠다고 초대했습니다. 제가 거절하니, 혹시 이희연을 만나러 가는 거냐며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만만한 상대에게 접근해 자기 편으로 만들면 바로 뒤통수를 친다고 했죠.

 

토요일 아침이 될 때까지도 저는 민정의 생일파티에 갈 지 말지 고민했습니다. 민정이도 믿을 수 없었거든요. 그때 엄마가 집에 손님이 오니까 나가 놀라고 쫓아내는 바람에 저는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집에서 나오니 민정이가 생일파티 단톡방을 열고 저를 초대했습니다. 쏟아지는 카톡을 하나하나 다 읽었지만 채팅방은 열지 않고 읽지 않은 척 했습니다.

 

여전히 갈까 말까 고민하던 저는 머리핀을 선물로 골라 약속 장소인 학교로 갔습니다. 약속시간이 30분이나 남았지만 몇몇이 벌써 도착했는지 교실 안이 소란스러웠죠. 왁자지껄한 목소리 사이에서 저는 어렴풋이 희연이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희연? 분명 며칠 전 민정이가 이희연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으면서 생일파티에는 왜 초대한 것일까요? 혹시 민정, 희연, 여진이 등 여럿이 공모해서 저를 부른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대화를 마저 엿들었죠.

 

희연은 저보고 뒤에서 남자나 후리고 다니는 여우라며 험담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곧 제게 들은 이야기를 완전히 꼬아버리고 과장까지 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숨이 멎어버릴 것 같던 저는 복도를 빠져나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는데요, 그 때 피자 배달원과 부딪히면서 머리핀을 잃어버렸습니다.

 

학교를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자 카톡- 하는 소리를 내며 민정이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안 오길 잘했고 부르지도 않은 이희연이 와서 금방 끝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채팅방을 열자 민정이는 음성파일 한 건을 보내주었습니다.

 

음성 파일은 희연이와 아이들이 나눈 대화였습니다. 희연이는 저 뿐만 아니라 제 가족까지 험담했고, 3월 생리대 도난사건은 윤인서가 범인이라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음성이 끝나자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저는 에어팟을 급하게 뽑은 뒤 집까지 뛰어갔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간 학교에서 저는 민정이가 머리핀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계단에서 떨어뜨린 머리핀이었죠. 한편, 희연이는 자기가 언제 험담했냐는 듯 같이 연극을 보러 가자고 꼬드겼습니다. 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죠. 대문을 닫자, 뒤에서 희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가 뭐래도 우린 베프야! 내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알지?”

 

저는 새벽까지 잠에 들지도 않은 채 앞으로 뭘 해야 할 지 생각했습니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혼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시간 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저는 교실의 문을 열고 칠판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분필을 들어 한 글자 한 글자씩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3월 생리대 도난 사건의 범인은?=이희연♡베프’ 그 날 모였던 아이들을 좀비처럼 그려 칠판을 빽빽이 채우자, 몸의 감각들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불이 켜지더니 문 앞에서 홍상윤이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곤 칠판과 저를 번갈아 쳐다보았죠. 저는 토끼 눈이 되어 홍상윤을 바라 보다 휴대전화와 블루투스 스피커를 건넸습니다. 조회 시간 직전 음성 파일을 재생시켜 달라고 부탁했죠. 홍상윤은 머뭇거리다 기기들을 건네 받고 다시 학교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며 교실을 붉게 비추자, 저는 화단 앞으로 가 지나가는 봄의 향기를 힘껏 들이마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