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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왜 우리의 일상이 되었을까?│여행의 이유 (Why do we travel?)│김영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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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왜 우리의 일상이 되었을까?│여행의 이유 (Why do we travel?)│김영하

SEA OTTER'S BOOKSHOP 2019. 8. 23. 20:40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전세계적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1995년과 2017년의 항공기 이용 인구를 비교해보면 그 수가 무려 세 배나 늘어 난 것을 알 수 있죠.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해외여행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을까요? 1988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해외도피 우려, 병역기피 등의 사유를 들어 여권을 발권할 수 있는 연령에 제한을 걸고있었습니다. 그러다 1년 뒤인 1989년,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 되며 여행을 가는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죠.

 

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해외여행, 국내여행 모두를 ‘일상’으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한 달 살기, 제주도에서 일 년 살기, 집 근처 호텔에서 바캉스 즐기기가 대표적인 사례죠. 여행을 편리하게 해주는 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어째서 여행은 우리의 ‘일상’으로 변하게 된 것일까요? 각 지역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단이 많아지고 있음에도 여행자들은 왜 직접 여행을 가려고 하며 그 수는 왜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요?

 

올해 4월 출간된 이후 줄곧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산문, ‘여행의 이유’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현재를 짓누르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바로 여행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특히 사회생활을 할수록 바삐 울리는 전화와 메시지가 주는 압박감을 더 심하게 느끼는데, 여행을 가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자 ‘Nobody(노바디)’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처음엔 방구석 여행자(armchair traveler)로 시작합니다. 쏟아져 나오는 여행 TV프로그램과 에세이, 다큐멘터리 등을 보면서 여행지에 환상을 품죠. 그러다 시간과 주머니 사정이 적절히 맞게 되면, 정제된 소설을 따라 읽는 것처럼 정제된 환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행은 스스로 계획한 일정에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통제력이 있는 소설과 매우 유사합니다.

 

여행이 소설과 닮은 또 다른 특징은 끝이 있다는 점입니다. 여행이 끝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가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각들이 되살아 납니다. 결국 여행은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준다는 점에서 묘한 중독감을 주고 또 다시 여행을 갈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행의 이유’를 쓴 김영하 작가는 자신이 여행을 반복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마치 소설을 쓰듯 되돌아 봅니다. 그는 소설 속 등장인물을 입체적으로 구상하는 편인데, 자기 자신을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때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프로그램이란, 자기도 모르게 갖게 된 신념 혹은 믿음을 의미하죠. 행동습관이나 고정관념, 정치적 성향 등이 그 예입니다.

 

작가가 어렸을 때를 되돌아보니, 부모님의 직장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주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한 곳에 정착한 적이 없었던 그는 떠돌아 다니는 삶이 더 익숙해졌죠. 무엇보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 발동해, 여행하지 않고는 안정감을 느낄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것 같다고 그는 결론 내렸습니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여행 경험을 쌓고 있던 김영하 작가는 TV 예능프로그램 알쓸신잡에 출연제의를 받고 여러 지식인들과 함께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합니다. 이들은 같은 장소에 가더라도 낮에는 각자 자유롭게 여행하고, 저녁시간에만 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패널 한 명 당 촬영 분과 식사시간을 합치면 하루에만 75시간이 훌쩍 넘는 분량의 여행 기록이 나왔으나, 이를 1시간 30분 분량으로 편집하면서 여행의 핵심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는 알쓸신잡에 출연하며 방구석에서도 진짜 여행을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식인들이 도심 곳곳을 개성 있게 여행하면 방구석 여행자인 우리는 직접 가지 않더라도 그 장소에 대한 정확한 통찰과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번 가본 적 있는 곳이 나오거나, TV를 보고 난 후에 방문하게 되면 그 장소가 주는 메시지를 더 풍요롭게 느낄 수 있죠.

 

프랑스 작가 에두아르 글리상도 아내 실비 세마(Sylvie Séma)를 이스터섬에 대신 보내 자신이 간 것처럼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내가 놓쳤을 사람들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상상해 이스터섬을 더 정교하게 묘사했죠.

 

한편,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이 끊임없이 여행을 갈구하는 것은 초기 인류부터 이어져 온 본능일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라고 정의했죠. 영어로 Viator(바이애이터)는 여행자를 뜻하며 앞에 사람을 의미하는 homo(호모)가 붙어 여행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초기 인류는 쿠두 영양을 사냥하기 위해 8시간 내내 뒤쫓아 탈진 시켰다고 합니다. 이동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 수밖에 없었죠. 한 번 여행을 시작하면 우리의 프로그램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이동 본능이 발현돼 끊임없이 여행을 갈구하는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